HUFSans
~(15) 민경중 동문 방송통신심의위윈회 사무총장 (중국어,83)
CBS에서 28년간 기자 생활 후 현재 방송통신심의위윈회(이하 방심위) 사무총장을 역임하고 있는 민경중(중국어과 83) 동문. 민 동문은 자신의 원동력을 외대에서부터 배운 도전정신과 프런티어 정신으로 꼽는다. 민 동문은 CBS에서 근무하면서 기획조정실장, 노조위원장, 해외특파원, 노컷뉴스부장, TV 편성제작국장, 보도국장, 크로스미디어센터장, 제주본부장, 마케팅본부장 등 여러 업무를 수행했다. 대학에서 강연도 하고 로펌에서 근무하기도 하며 다양한 커리어를 쌓은 민 동문은 자신이 선택한 모든 일에 후회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민 동문이 CBS에 입사한 87년 당시 CBS는 남들이 보기엔 작은 기독교 라디오 방송사라는 열악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라디오 매체라는 이유로 차별도 많이 받았지만 민 동문은 이 방송사가 결코 작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기사의 진실성과 기자가 가지고 있는 가치가 언론사의 브랜드를 뛰어넘을 것이라 믿었다. 이에 민 동문은 차별과 서러움 속에서도 기죽지 않고 정권 비판적인 기사 등 기성 언론은 다룰 수 없는 기사를 다뤘다. 그 결과 CBS가 라디오뿐만 아니라 TV, 인터넷 노컷뉴스, 신문까지의 크로스미디어를 다루는 언론사로 성장했고 그 중심에 민 동문이 있었다. 민 동문은 학교의 브랜드 네임, 언론사의 브랜드 네임을 뛰어넘어 민경중이라는 브랜드로 성공하기 위해 노력했다. 민 동문은 그간 살아오며 쌓은 경험이 현재의 공직 업무를 수행하는데도 큰 도움이 됐다고 말한다.
현재 민 동문이 몸담고 있는 방심위는 민간 독립기구인 동시에 내용규제기관으로, 정부 지정 공공기관은 아니지만 기금 지원을 받는 기구다. 방심위가 정부기관이 아닌 이유는 공적으로 전파를 사용하는 방송사 콘텐츠의 객관성과 공정성을 판단하기 때문이다. 방심위의 규제 대상은 공중파, 지상파, 종편 방송, 광고, 유튜브, 개인방송 등등의 모든 방송과 유해 사이트 및 불법 사이트 등의 통신분야다. 현재는 방송과 통신의 범위가 광범위해진 만큼 방심위의 역할 또한 다양해지고 있다. 민 동문은 방심위 사무총장으로서 방심위가 제시한 심의와 제재를 방송사들이 충분히 수용하고 납득할 수 있도록 프로세스와 기준을 명확히 하는 업무를 한다. 또한 그 과정에서 중립성이 지켜지도록 위원회와 직원 사이의 중심을 잡도록 돕는다. 민 동문은 취임 후 ‘디지털성범죄심의지원단’을 신설해 디지털 성범죄 관련 지원을 24시간 대응체계로 운영하고 ‘디지털성범죄심의소위원회’를 상시 회의로 가동 중이다.
오랜 기자생활을 해온 민 동문은 현재 한국 언론에 대해 언론인들이 이미 플랫폼의 주도권을 상당 부분 빼앗겼음에도 과거의 기득권에 너무 취해있음을 지적한다. 민 동문은 현재의 언론이 평판도와 신뢰도, 플랫폼으로의 언론의 역할이 줄어든 만큼 언론인들도 세상의 흐름을 받아들여 제너럴리스트보다는 스페셜리스트가 돼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 예로 미국의 뉴옥타임스의 과학, 기술 기사를 작성하는 기자들은 어려운 내용을 독자들이 읽기 쉽도록 전달함을 들었다. 반면 우리나라의 언론사들은 스페셜리스트들이 쓰는 기사가 적고 정치나 사람중심의 기사에 함몰돼있다. 민 동문은 언론이 이미 다 아는 제너럴 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며 전문성을 갖춘 기자들이 배출이 돼야 함을 조언했다.
외대에 각별한 애정과 특별한 인연을 갖고 있는 민 동문은 총동문회 주관 동문 멘토링에서 멘토로 3년째 활동하고 있다. 세상을 살면서 실패 할 지라도 시도하는 도전정신을 외대에서 배웠다는 민 동문은 어렸을 적 외교관을 꿈꾸며 외대 진학을 희망했다. 민 동문이 직접 경험한 외대는 외관은 작을지라도 그 안에 세계를 품은 곳이다. 어학을 기반으로 해당 국가에 대한 관심을 키우는 외대에는 영토가 없으며 외대생들은 모의 올림피아드나 모의 유엔총회, 연극제 등을 통해서 새로운 문물에 대한 두려움을 떨칠 수 있었다. 96년 민 동문이 CBS 초대 북경특파원으로 중국에 갔을 당시 중국에 있는 주재원의 70퍼센트가 외대인이었다. 한-중 수교가 이뤄진지 불과 몇 해 후였지만 많은 외대 동문들이 중국에 진출해 있었다. 민 동문은 66개국을 취재 혹은 여행하면서 어디서든 외대인을 만날 수 있었고 외대인의 무대는 전 세계이며 ‘외대에서 뜨는 태양은 지지 않는다’는 말을 실감했다고 한다. 민 동문은 기자생활을 하며 많은 부분들에서 좋은 인연으로 외대 동문들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었고 그때 받은 도움을 내리사랑으로 후배들에게 고스란히 전해 주고 싶다는 생각에서 멘토링을 시작했다. 또 민 동문은 주변의 동문을 통해 학교에 기대기보다는 개인이 독자생존으로 주어진 환경 속에서 성실하게 노력해서 포지셔닝에 올라가는 경우를 많이 봤다. 그 예로 민 동문이 2008년 보도국장을 맡았을 당시는 서울의 17개 주요 언론사 중 8명이 외대 출신 보도, 편집국장인 외대 언론 최전성기였다. 당시 민 동문이 만난 동문들은 모두 그 회사에서 외로이 고군분투해서 그 자리까지 올라왔다. 그 모습을 보며 민 동문은 ‘후배들에게는 그 고통을 덜 겪을 수 있도록 꽃길을 걷게 하는 방법이 없을까’ 혹은 ‘가시밭길이라도 조금이라도 돌을 골라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고 이것이 멘토링 참여로 이어졌다고 전했다. 민 동문은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선 소년이 더 멀리 세계를 바라보는 것처럼 후배들이 멘토의 도움을 받고 더 멀리 볼 수 있길 바란다고 말한다. 풀뿌리 민주주의처럼 외대 총동문회는 ‘풀뿌리 총동문회’의 성격이 강한만큼 멘토링 사업 또한 처음에는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았고 지원도 없었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렇지만 민 동문은 멘토로서 보람을 느끼는 일도 많았기에 3회째 멘토로 활동하고 있다. 민 동문은 가장 기억에 남는 일로 멘토가 멘토링활동이 끝나고 “멘토링을 통해서 자기가 선택한 외대가 얼마나 좋은 학교인지 알게 됐고 외대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게 됐다며 학교를 옮길 생각을 접고 지금의 자리에서 더 열심히 하겠다”고 말했던 것을 꼽았다.
민 동문은 후배들에게 스스로가 어떤 역량을 쌓아나가고 자신의 브랜드를 어떻게 가꿔나가는지에 따라 얼마든지 역량을 발휘할 수 있으며 자기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말라고 말한다. 민 동문은 매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하는 CES(국제전자제품박람회)에 자비로 방문한다. CES는 연초에 진행되는 만큼 전 세계의 IT, 기술, 플랫폼 등의 한해 첫 흐름을 읽을 수 있는 자리다. 민 동문은 학생들에게 “배낭여행을 가고, 미술관을 가고 하는 것도 좋지만 그런 활동들은 나이 들어서 가도 괜찮다” 며 “젊었을 때는 CES 같은 새로운 것 경험할 수 있는 곳이나 구글과 아마존의 세미나 혹은 애플의 신제품 발표회 같은 세상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곳 방문을 시도해보라.” 고 조언했다. 또 민 동문은 “백세시대가 도래한 만큼 평생 4가지 이상의 직종에 종사해야 할지도 모르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한 우물만 파서는 안되고 여러 우물을 자주 파야 한다” 며 “전 세계를 상대로 기회를 창출할 수 있는 시대인 만큼 다양한 경험들을 통해 새로운 일을 하게 됐을 때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또 그 경험들을 쌓는 과정에서 멘토링이나 동문들과의 네트워킹의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기를 조언했다.
마지막으로 민 동문은 앞으로의 목표에 대해 공공분야에서 더 일하고 싶은 마음도 있으며, 젊은 친구들하고의 소통을 중시하는 만큼 앞으로도 기회가 된다면 외대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고 싶다고 답했다.